천년고찰 천태암 이야기
천태암(天台庵)
천태암은 신라 문무왕 5년(665) 혜암율사(慧庵律師)가 창건한 고찰로, 고려 명종 25년(1195)부터 지리산 상무주암(上無住庵)에 은거하며 선의 참뜻을 깨달은 보조국사(普照國師)가 구산선문 가운데 하나인 동리산 태안사를 둘러본 후 이곳 천태암에 머물며 자연석굴에 16나한을 모시고 법당과 요사를 중창하여 후학들을 제접하였다 한다.
국사는 이곳 산세가 중국의 불교성지 4곳 중 하나로 잘 알려진 아미산(峨嵋山)과 닮았다 하여 아미산 천태암(天台庵)이라 이름하였다. 지금의 산신각 왼편으로 산길을 따라 오르면 산 정상 아래로 벼랑에 작은 대(臺)가 형성되어 있는데 이곳에 앉아 선정을 닦았으니 이곳이 보조국사 좌선대(坐禪臺)다.
하루는 나무새를 만들어 날려 보내니 지금의 조계산에 날아 앉는지라 조계산이 정혜결사(定慧結社)를 본격적으로 실행할 도량임을 깨닫고 서기 1200년에 지금의 송광사로 자리를 옮겼다 한다.
<동사열전>(1894)에 따르면 이 지역 곡성 석곡방 용계(龍溪) 출신경암당(敬庵堂) 용운처익(龍雲處益)스님이 경신(1860)과 신유(1861) 년간에 곡성 천태암을 중수했다고 기록하고 있고, <곡성군지>(1918)에는 천태암은 아미산에 있는데 산의 정상에 오르면 바라보이는 경계가 시원하다고 전하고 있다.
<조선환여승람>(1922~1937)에는 천태암이 아미산에 존재한다고 언급하고 있으며 또한 목사동면 구호정(龜湖亭) 8경시(八景詩)에 천태암의 저녁 종소리(天台暮鐘)가 포함되어 있음을 전한다.
한편 일제강점기에 동명선지(東溟善知)스님이 쓴 <천태암중수화문(天台庵重修化文)>에도 천태암 중수에 인연을 지을 것을 권하고 있어 천태암은 여전히 그 위상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곳 면 이름이 목사동인 것은, 천태암을 제외하고 지금은 모두 사라져 흔적이 묘연하지만, 옛날 한 때는 아미산 아래 열여덟 개소의 절[寺]이 존재했던 바, 십(十)과 팔(八)을 합하면 목(木)이 되므로 열여덟 절이 있는 고을이라는 뜻으로 목사동(木寺洞)이라 했다 한다. 아미산은 곡성 목사동면과 순천시 주암면 사이에 우뚝 솟은 산으로 그 맥이 조계산을 지나 뻗어왔다.
<천태암중수화문(天台庵重修化文)>에서는 이 아미산 천태암에 대해 16성(聖,아라한)이 상주(常住)하는 도량이며 칠원성군(七元星君,북두칠성)이 강림하는 청정한 곳으로 봉우리의 형상이 평지로부터 우뚝 솟아 마치 서천(西天,인도)에서 옮겨온 비래산(飛來山)과 같으며 신선경계의 바위와 낭떠러지가 높게 드리워져 흡사 동토(東土)의 소림굴(小林窟)과 같아 이곳이 참으로 해동의 승지(勝地)며 호남의 명구(名區)라고 찬탄하고 있다.
천태암에서는 주암댐으로부터 보성강(대황강)이 흘러들어오는 모습을 내려다볼 수 있으며 전면에 모후산이 기품 갖춘 손님처럼 정좌하고 있다. 왼편으로는 신령스러운 기운을 간직한 조계산이 바라보이고 오른편으로는 기개 당당한 무등산이 하늘에 맞닿은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다. 더욱이 맑은 날에는 멀리 장흥 천관산까지 아스라이 조망되고 있어 국사가 천태암에 머물며 좌선대에서 수행했던 마음을 조금이라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천태암은 1957년 화재 때 전각 일부가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명맥을 지속하여 이어오던중 호연스님의 원력과 신도님들의 불심, 그리고 사회 각계 뜻 있는 분들의 동참으로 2004년에 다시 중창되었다.
현재는 화엄사 대주(大周)스님이 주지 직을 맡아 기도 수행 정진하면서 불법 홍포에 힘을 기울이는 한편 절의 역사와 전통을 밝혀 정립하는 데에도 각별한 노력을 다하고 있다.
이렇듯 천태암은 창건 이래 지금까지 발원기도 성취도량이자 참선수행의 안심도량으로서 수많은 불자들의 귀의처가 되고 있으며 인근 지역 주민들에게 자긍심으로 자리하고 있다.